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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아플 때 부모는 앞뒤를 재지 않고 지갑을 엽니다. 그 자식이 사위나 며느리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조용히 건넨 돈이 엉뚱한 사람의 공치사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합니다.
경기도의 한 소도시에 사는 윤 씨는 올해 예순하나입니다. 시장 골목 끝에서 28년째 작은 미용실을 하고 있습니다. 의자 세 개짜리 가게지만 단골 할머니들 파마 손님만으로도 하루가 빠듯합니다. 남편은 버스 회사에서 정년퇴직한 뒤 아침마다 가게 셔터를 올려 줍니다. 외동딸은 결혼해 차로 20분 거리에 삽니다.
사위는 가구 배송 일을 합니다. 처음 인사 오던 날, 사위는 미용실 바닥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보더니 말없이 빗자루를 들었습니다. “어머님, 손님 계시니까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윤 씨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결혼한 뒤에도 사위는 두 달에 한 번은 꼭 장모 가게에 와서 머리를 잘랐습니다. 돈을 안 받겠다고 하면 계산대 옆 사탕 통 밑에 만 원짜리를 슬쩍 끼워 두고 갔습니다. 샴푸대 배수구가 막히거나 드라이기 콘센트가 헐거워지면 퇴근길에 공구 가방을 들고 들렀습니다.
사위의 어머니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아들 하나를 혼자 키웠습니다. 상견례 자리에서 사돈은 “우리 애는 내가 다 해 줬어요”라는 말을 세 번이나 했습니다. 윤 씨는 홀로 아들을 키운 어머니의 자부심이려니 하고 웃어넘겼습니다.
2년 전 겨울, 사위가 배송하던 침대 매트리스를 들고 계단을 오르다 그대로 주저앉았습니다. 허리 디스크가 터졌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다리까지 저려 걷지를 못했고, 의사는 수술을 권했습니다. 입원과 재활까지 한 달 가까이 일을 쉬어야 했습니다.
딸은 병원 복도에서 울먹였습니다. “엄마, 전세 대출 이자도 내야 하는데 이번 달 월급은 반밖에 안 나온대. 어머님은 형편이 어렵다고 하시고.” 그날 저녁 윤 씨는 미용실 문을 일찍 닫고 은행에 갔습니다. 낡은 의자와 샴푸대를 바꾸려고 5년 동안 부어 온 적금을, 만기를 넉 달 앞두고 깼습니다.
퇴원하던 날, 윤 씨는 먼저 원무과에 들러 수술비와 입원비 1,200만 원을 한꺼번에 계산했습니다. 영수증을 본 사위가 휠체어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장모님, 이건 안 됩니다. 보험 든 게 있으니 나오는 대로 갚겠습니다.” 윤 씨는 사위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앉혔습니다. “갚을 생각 말고 허리나 펴게. 사돈댁에는 말하지 말고. 괜히 마음 쓰실라.”
그 보험은 사위가 고등학생 때 어머니가 들어 둔 실손보험이었습니다. 계약자도, 보험금을 받는 사람도 어머니 앞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사돈은 “서류만 주면 내가 알아서 청구하마” 하고 진단서와 진료비 영수증을 챙겨 갔습니다. 몇 주 뒤 사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알아보니 오래된 보험이라 그 수술은 안 나온단다.” 사위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 뒤로 사위는 다달이 얼마씩 장모 통장에 돈을 넣으려 했고, 윤 씨는 그때마다 딸 통장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사이 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윤 씨는 새 의자 대신 헌 의자의 시트만 갈아 끼우고 지냈지만, 손자 얼굴을 보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서운한 일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사돈은 입원 기간에 병원에 한 번 들렀을 뿐인데, 친척 모임에서는 “아들 허리 수술시키느라 내 등골이 휘었다”고 했다는 말이 딸을 통해 들려왔습니다. 윤 씨는 그저 웃었습니다. 사돈 체면이 서면 사위 마음도 편하겠거니 했습니다.
올여름, 손자 백일잔치가 사돈댁 근처 한정식집 별실에서 열렸습니다. 장맛비가 그치고 볕이 쨍한 토요일 점심이었습니다. 상 위에는 백설기와 수수팥떡이 놓였고, 벽에는 손자 사진이 든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친척들과 사돈의 동네 지인들까지 스무 명 남짓 모였습니다.
식사가 반쯤 끝났을 무렵, 사돈의 친구 한 사람이 사위에게 물었습니다. “허리는 이제 괜찮고? 그때 큰 수술이었다며.” 대답은 사돈이 했습니다. “말도 마. 그때 내가 붓던 적금 깨서 1,200만 원 다 댔잖아. 홀어미 혼자 아들 수술시키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여기저기서 “역시 엄마밖에 없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윤 씨는 수저를 내려놓았습니다. 딸이 엄마 손을 꽉 잡았지만, 윤 씨는 딸에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오늘은 손자의 백일이었습니다.
그때 사위가 의자를 밀고 천천히 일어섰습니다.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습니다. “어머니, 그 말씀은 오늘 하지 마셨어야 합니다.”
사위는 휴대폰 화면을 친척들 쪽으로 돌렸습니다. 보험사 앱의 지급 내역이었습니다. 2년 전 날짜 옆에 수술·입원 보험금 1,200만 원이 찍혀 있었고, 받은 사람 칸에는 어머니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한 달 전에 아이 보험 들러 갔다가 알았습니다. 보험금이 안 나온 게 아니라 어머니 계좌로 다 들어갔더라고요. 그리고 제 수술비는 어머니가 아니라 장모님이 내셨습니다. 미용실 의자 바꾸시려고 5년 부으신 적금을 깨서요.” 사위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제가 따졌을 때 어머니는 다 지난 일이니 덮자고 하셨죠. 그런데 장모님 앞에서 또 그 말씀을 하시니 저는 더 못 덮겠습니다.”
별실 안에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 사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한참 뒤 사돈은 의자에 주저앉아 털어놓았습니다. 몇 년 전 아는 사람 말만 믿고 돈을 빌려 투자했다가 날렸고, 빚 독촉에 시달리다 보험금으로 그 빚을 갚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한테 손 벌릴 면목이 없어서 그랬어요. 사돈, 정말 미안해요.”
윤 씨는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사돈 앞으로 가서 물 잔을 건넸습니다. “사돈, 그동안 속이 얼마나 타셨어요. 그 돈 돌려 달라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다만 앞으로 힘든 일이 생기면 아들한테 먼저 말씀하세요. 혼자 끌어안고 숨기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된 거잖아요.”
잔치가 끝나고 사위는 장모를 배웅하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장모님, 그 돈은 제가 꼭 갚겠습니다.” 윤 씨는 사위의 허리를 툭 쳤습니다. “이 허리로 손자 업어 주면 그걸로 다 갚은 걸세.” 몇 달 뒤부터 사돈은 매달 손자 이름으로 된 통장에 돈을 넣고 있습니다. 사위가 어머니와 함께 정한 방법이었습니다.
이솝 우화에는 공작이 떨어뜨린 깃털을 주워 몸에 꽂고 공작 행세를 하던 까마귀가 나옵니다. 까마귀는 결국 깃털을 모두 뽑힌 채 쫓겨납니다. 남의 정성으로 세운 체면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돈을 조용히 건네는 것은 미덕입니다. 하지만 가족 사이라도 돈이 오간 길만큼은 서로 알고 있어야 오해가 쌓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실이 드러난 뒤에는 잘잘못을 끝까지 따지기보다 다시 함께 걸어갈 길을 여는 쪽이 오래 남습니다.
올가을 윤 씨는 미용실 문을 일찍 닫고 딸네 식구들과 동네 하천변 억새길을 걸었습니다. 사위가 손자를 등에 업고 앞장섰고, 물가의 억새가 바람에 은빛으로 일렁였습니다. 노을이 물 위에 길게 깔릴 무렵, 윤 씨는 앞서 걷는 사위의 곧게 펴진 등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