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WN 뉴스 · 2026.11.02 04:49

“남동생 빚 4000만원 갚아줬는데..” 8년 뒤 창고 짓던 업자의 영수증에 눈물이 났다

형제 사이에 오간 돈은 갚아도 그만, 안 갚아도 그만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돈을 받은 쪽은 그 말이 더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너무 크면 사람은 고맙다는 말 대신 발길을 끊기도 합니다.

윤 씨는 올해 예순여섯입니다. 남쪽 지방의 한 산골 마을에서 남편과 함께 서른다섯 해째 사과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비탈밭 사과나무 육백 그루가 부부 살림의 전부입니다. 아들과 딸은 도시로 나가 가정을 꾸렸고, 지금은 늙은 부부 둘이서 과수원을 지킵니다.

윤 씨는 사 남매의 맏이입니다. 막내 남동생과는 열두 살 터울입니다. 어머니가 늦둥이를 낳고 몸져눕는 바람에 열두 살 윤 씨가 동생을 등에 업고 키우다시피 했습니다. 동생은 걸음마를 떼고 나서도 누나 치맛자락을 놓지 않았습니다.

윤 씨가 시집가던 날, 열 살 동생은 동구 밖까지 따라 나와 울었습니다.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왔을 때도 동생은 집보다 누나네 과수원에 먼저 왔습니다. 군복 차림으로 사다리에 올라 사과를 따며 동생이 말했습니다. “누나, 나 제대하면 돈 많이 벌어서 누나 호강시켜 줄게.”

동생은 제대한 뒤 도시의 공장에 다니며 결혼해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8년 전 겨울, 한밤중에 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누나, 친구 식당에 보증을 섰는데 친구가 가게를 접고 연락이 끊겼어. 빚이 4,000만 원이래. 못 갚으면 집까지 넘어갈 수 있대.”

윤 씨는 남편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남편은 한참 말없이 담배만 태우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부부는 10년 동안 부어 온 적금을 깨고 그해 가을 사과 판 돈을 보탰습니다. 그래도 모자란 돈은 과수원 아래 논 한 뙈기를 팔아 채웠습니다.

도시로 올라간 날, 윤 씨는 동생 손에 봉투를 쥐여 주었습니다. “이 돈 갚을 생각 말고 올케랑 조카 데리고 잘 살아라. 누나는 그거면 된다.” 동생은 봉투를 든 채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누나, 이 돈 꼭 갚을게. 다 갚기 전엔 누나 볼 낯이 없어.”

그날이 동생 얼굴을 본 마지막이었습니다. 동생은 명절에도, 어머니 기일에도 오지 않았습니다. 전화번호는 바뀌었고, 올케에게 물으면 “지방 공사 현장을 다닌대요, 형님. 저한테도 다달이 돈만 부치고 얼굴은 잘 안 보여요” 하는 대답뿐이었습니다.

윤 씨는 서운했습니다. 갚으라고 한 적도 없는데 동생은 돈과 함께 사라져 버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동생한테 돈 떼였다며?” 하고 수군거릴 때보다 혼자 잠 못 드는 밤이 더 힘들었습니다. 어디서 아프지는 않은지, 끼니는 거르지 않는지, 걱정이 서운함보다 컸습니다.

그러다 지난 늦여름, 큰 태풍이 마을을 덮쳤습니다. 밤새 바람이 지붕을 두드리더니 새벽녘 과수원 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날이 밝고 보니 30년 된 창고가 폭삭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선별기도, 사과 상자도, 분무기도 무너진 슬레이트 밑에 깔려 있었습니다. 수확을 한 달 앞둔 때였습니다.

부부가 넋을 놓고 있는데 사흘 뒤 낯선 트럭 한 대가 과수원 길로 올라왔습니다. 쉰 남짓한 사내가 내리더니 자신을 정 씨라고 소개했습니다. “근처에서 일하다 소식 듣고 왔습니다. 창고 공사, 수확 전까지 끝내 드리겠습니다.”

정 씨는 인부 둘을 데리고 3주 동안 새벽부터 해 질 때까지 일했습니다. 철골을 세우고 패널로 벽과 지붕을 올렸고, 쓸 만한 선별기는 고쳐서 다시 들여놓았습니다. 윤 씨는 날마다 국수를 삶아 새참을 날랐습니다. 정 씨는 새참을 먹을 때마다 과수원을 한참씩 둘러보곤 했습니다.

공사가 끝난 날은 하늘이 맑았습니다. 윤 씨는 장롱에 넣어 둔 봉투를 꺼냈습니다. 남은 적금을 털고 아들딸이 보탠 돈을 더해 마련한 공사비였습니다. “정 사장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2,800만 원 맞춰 놨습니다.”

정 씨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사장님, 비용은 벌써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습니다. 공사비 영수증이었습니다. 입금자 칸에 낯익은 이름 세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8년째 연락이 없던 막냇동생의 이름이었습니다.

종이를 쥔 윤 씨의 손이 떨렸습니다. 정 씨가 모자를 벗으며 천천히 말했습니다. “저는 형님하고 6년을 같은 현장에서 일했습니다. 형님은 남들 쉬는 날에도 일을 찾아다녔어요. 술 한 잔 안 하고 품삯을 모았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누나한테 갚을 돈이 있다고만 했어요. 다 갚기 전엔 누나 얼굴을 못 본다고요.”

“재작년에 형님이 제게 통장을 하나 맡겼습니다. 누님 댁에 일이 생기면 이 돈으로 해결해 달라고요. 자기가 나서면 누님이 안 받으실 거라면서요. 이번 태풍 소식도 형님이 먼저 듣고 저한테 연락했습니다.”

“그래서 그 애는 지금 어디 있어요?” 윤 씨가 겨우 물었습니다. 정 씨는 대답 대신 과수원 아래를 가리켰습니다. 길가에 세운 트럭 옆에 볕에 검게 그은 남자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희끗한 머리에 어깨가 굽었지만, 윤 씨는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윤 씨는 신발도 제대로 꿰지 못한 채 비탈길을 뛰어 내려갔습니다. 동생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습니다. “누나, 아직 다 못 갚았어. 그래도 창고만큼은 내 돈으로 세워 주고 싶었어.”

윤 씨는 동생의 손을 잡았습니다. 손바닥은 굳은살로 딱딱했고 손등에는 상처 자국이 가득했습니다. “이 바보야, 누나가 언제 갚으라고 했니. 네 얼굴 한 번 보는 게 4,000만 원보다 더 귀했다.” 동생은 누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어린아이처럼 울었습니다. 뒤따라 내려온 남편이 동생의 등을 두드렸습니다. “처남, 이제 됐네. 들어가서 밥 먹세.”

그날 저녁, 새 창고 앞 평상에 넷이 둘러앉았습니다. 윤 씨는 닭 한 마리를 삶고 묵은지를 꺼냈습니다. 동생은 8년 만에 누나 밥을 먹으며 몇 번이고 숟가락을 내려놓고 눈가를 훔쳤습니다. 윤 씨는 그때마다 동생 밥 위에 닭고기를 한 점씩 얹어 주었습니다.

돈을 건넨 사람은 잊어도 받은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미안함이 너무 커서 오히려 멀어지는 가족도 있습니다.

혹시 그렇게 연락이 끊긴 형제가 있다면 돈 이야기보다 얼굴이 보고 싶다는 말을 먼저 건네 보세요. 그 한마디가 오래 닫혀 있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올가을 윤 씨네 과수원에는 사과가 붉게 익었습니다. 수확하는 날 동생은 올케와 조카까지 데리고 와서 사다리에 올랐습니다. 새 창고 안에 사과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 갔고, 해 질 녘 산그늘이 비탈밭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습니다. 윤 씨는 사다리 아래에서 동생이 건네는 사과를 받으며 오래도록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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